호상인줄 알았는데...
그대 가는 뒷모습이..
70生을 마감하고 떠나던 날 때아닌 부슬비는 청승맞게 내리고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잘 있으란 말 한마디 못하고 왔던 길 되돌아가야 하는 시간 발목 적시는 빗물보다 응어리진 恨에 더 가슴 시렸을 그날 마지막 가는 길 사랑했던 이 남겨두고 차마 떨어지지 않았을 발걸음이여!
슬프다 그렇게 가는 인생
불쌍타 그렇게 지는 사랑
허무한 사랑...
말기암으로 마지막 수개월은 고통스러웠을지라도 공직에, 한 기관의 장으로서 명망은 얻었을 테니 그리 여한은 없었겠지.
추적추적 비는 내리고 한적한 시골병원 영안실에서의 발인식.
참 이상도 하지. 정승집에 말이 죽으면 삽작(대문)밖이 미어터져도 정작 정승이 죽으면 조문객이 없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했다 싶었다. 나이 70에 남편을 먼저 보낸 게 무에 그리 죄스럽다고 소리도 못 내고 구석진 곳에서 울고 있는 미망인도 좀 이상하고 맏상제 같은? 이는 슬픔이 과하다 못해 넋이 나갔는지 얼굴에는 서늘한 기운마저 감도는데.
에이 그래도그렇지. 호상인 줄 알았더니 이거 초상집 분위기 진짜 초상집 같네.
예?
아.... 예! 그랬었군요.
오고가는 말들.. 속삭이는 대화들 중에서 아.. 예... 쉬쉬하며 나누는 이야기가 심상치 않다. 아, 그랬구나. 누가 알았을까. 喪을 당한 그녀가 돌아가신 어른의 숨겨놓은 여자였다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십 년을 알고 지낸 어른이었는데 정말 몰랐네 깜쪽같이 몰랐어. 호적에도 아직 처녀로 되어 있다네.
사랑이 그런건가? 사랑하면 그렇게라도 살고 싶은 걸까. 한평생 죄인처럼 숨어 살아도 행복했을까?
그래서 자식하나 없이 살아도 울타리 넘어 큰 소리 나는 일없이 살았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젊은 나이에 잘못 얽힌 연분에 평생을 가슴 앓으며 숨어 살았을 그녀도 불쌍하고 남편을 빼앗기고도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호적이나마 깨끗이 물려주려 했던 본처도 가련하고 평생 자식들 앞에 떳떳지 못했고 어느 한 여자에게도 충실치 못했을 그 남자 또한 불쌍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차지하고 늙도록까지 오손도손 한 이불 밑에서 살았으니 행복했었는지 묻고 싶다. 사람이 자기 욕심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 수도 있구나. 그렇게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해로하고 싶었을까.. 그대는 무슨 맘으로 그 남자를 바라고 살았을까..
비록 남편은 뺏겼으나 생계를 책임져주는 그 맛에 자족하며 살았는지 궁금하다. 지지고 볶으며 살지 않고 품위를 유지할 수 있어서 행복했었는지 묻고 싶다. 자식도 없이 사는 첩이랑 비교할 수 없는 기득권때문에 당당하고 흡족했는지 물어보고 싶다. 호적은 깨끗했으니 가슴에 맺힌 피멍쯤이야 괜찮다 할 것인지 묻고 싶다.
머리 터지도록 싸움하는 부모 밑에서 마음 졸이며 살지 않아서 정서적으로 편했는지 묻고 싶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공백을 무엇으로 채우며 살았는지도 묻고 싶다. 그런 아버지라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독하게 담쌓고 살았던 그 애증의 세월을 이제 와서 무엇으로 보상받고 싶은지 묻고 싶다.
고인에게도 묻고 싶다.
목숨같은 사랑을 아내보다 좀 더 늦게 만난 죄 때문에 평생이 괴로웠었는지 묻고 싶다. 정말로 사랑했다면 그 여인을 위해 남자답게 정정당당하게 본처와 깨끗이 갈라섰어야 옳지 않았을까. 우유부단했던 한 남자 때문에 두 여인과 그 자녀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렇게 해서라도 아버지로서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었을까. 아니 어쩌면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랑을 접고 원점으로 돌아오고 싶었을까. 자식 앞에 장사 없고 자식들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할 수 없으니 사랑하지만 헤어지자는 말 하려고 벼르다 벼르다 차마 못했을까.
아... 정말 모르겠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겠고 사랑하면 용기가 생기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사랑 앞에선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는 드라마 같은 대사도 잘 모르겠다.
맘 가는대로 감정이 흐르는 대로 살아보고 싶다 가고 자꾸만 멈칫거려지는 것은 아직 사랑해보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살아보면 사랑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인듯 하다. 사랑이 죄냐고 물으신다면 예.. 죄인듯 싶습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이 사람과 마지막이 어찌 될 것인지 미리 예견하고서 만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 만남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만남으로 인해서 연결되는 많은 관계들을 생각해보면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여정인지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태어날 때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지만(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죽을 때는 [아무개가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다...]라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죽습니다..
장례식에서 고인을 두고 회상하며 슬퍼하는 이야기들이 평소에 자신의 모습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남보다 헤어질 때의 모습이 더 중요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성경 속의 인물 야곱이 죽었을 때의 장면이 참 인상적입니다.
어린 소년이었을 때 품에서 잃어버린 그 자식 요셉이 훌륭히 자라 성공하여 입지전적인 인물로 이국의 총리대신이 되어 그 아비와 형제를 거두었는데 잘 키운 자식 요셉으로 인해 그 아비가 세상을 떠났을 때 70일 동안이나 이방민족들이 그를 위해 애곡하고 최고급 향품으로 이집트 방식으로 미이라를 만들며 애도하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과 겨루었던 죄로 평생을 절뚝발이로 산 야곱의 마지막 뒷 모습을 그 아들이 그 아비의 이름을 회복시키고 명예를 회복시키고 아름다운 작별을 할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행복이요 축복이 아닙니다.
살아있을 때도 향기롭게 살고 싶고 마지막 뒷 모습도 아름답게 퇴장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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