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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모두 안녕, 백 장군님 안녕히 가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by Happy Plus-ing 2020.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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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모두 안녕, 백 장군님 안녕히 가십시오.

 

호사유피(虎死留皮),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인사유명(人死留名),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데..... 박원순 전 시장은 단 7줄의 유서를 남겼습니다.

 

 

 

 

모두 안녕

 

 

 

인간의 존엄성

우리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 헌법이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천명하고, 이를 모든 법과 국가 통치 작용으로부터 고유한 인간의 가치로 보장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이지요.  아무리 흉악한 인간이라도 그 죄를 뉘우치고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에 그의 존엄성이 부인되거나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인식해야 합니다. 

 

박원순씨가 왜 유명을 달리해야만 했는지 알만한 사람 이젠 다 아는데 털어 먼지 안 날 사람 없으니 그냥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는 못할 망정 뭔 때아닌 이순신장군님과 김구 선생님까지 모셔와서 오늘 또 이 아까운 하루를 낭비하게 만드는지요.

[지난 11일 여권 지지 성향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한 이용자는 "한 사람의 치열한 인생이 이렇게 도덕적 재단으로 다 날려가는 건가"라면서 "난중일기에서 '관노와 수차례 잠자리에 들었다'는 구절 때문에 이순신이 존경받지 말아야 할 인물인가요? 그를 향해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건가요?"라고 말했다.]

 

진중권 교수와 김광일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한 목소리로 지금이 조선시대냐? 박원순이 이순신이냐? 그럼 국민은 관노냐? 라고.... 이렇게 나라를 두 동강이로 분열시키면서까지 온 나라를 뒤집어 흔들어놓고 무책임하게 가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나라를 위한 공은 공이라 치고,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했던 사적인 모든 일들은 피해 당사자와 박 시장의 남은 유족들이 오롯이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비겁한 사람 같으니라고...

 

 

 

 

생전 마지막 CCTV모습

 

 

기독교에서는 자살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믿고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도 자살한 사람은 공개 미사를 드려주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다행히 박원순 전 시장은 불교신자였다고 합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죽음은 또 다른 시작인 것을...

 

 

한평생 고생 많았다

 

 

공교롭게도 장맛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께서도 지난 10일에 별세하셨습니다.  1920년 11월 23일 (북한 강서) ~ 2020년 7월 10일 (향년 99세).

한국인 최초 4성 장군인 고(故) 백선엽 장군의 유해가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6.25전쟁 당시 저의 시아버님은 일반병으로 마지막 몇 달을 전쟁에 참여한 공으로 현재 영천 호국원에 잠들어 계십니다.  생명은 누구나 소중하지만 그래도 전쟁 영웅이신데 마지막 가시는 길이라도 그에 걸맞는 예우를 해드려야 대한민국의 국민된 도리가 아닐까 많이 섭섭해하실 거 같기도 하네요. 장군님 안녕히 가십시요. 

 

한평생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이 잠드소서!!!

 

친일파니 매국이니 따지느라고 나라의 영웅이 떠나는 마당에 그에 상응하는 예우는 아예 안 보이고 공식 논평조차 없습니다. 박원순의 죽음과 너무나 상반된 모습이지 않습니까? 자살이 추앙을 받을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살이 추앙받는 유일한 방법은 타인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위인들에게나 존경심을 모아 올려드리는 것이고 추앙받아 마땅한 것이고 그분들에 대한 예우는 반드시 달라야 할 것입니다. 

 

 

 

서대문 형무소 내/ 모든 순국 선열들께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죽음으로 이름을 남긴 선조들을 다시 한번 기념하고 묵상합니다.

을사늑약 후 충정공 민영환, 동포에게 사죄하고 자결하였습니다.

1905년 11월 30일 오전 6시께 시종무 관장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은 종로 전동에 있는 중추원 의관 이완식의 집에서 단도로 자신의 배와 목을 찔러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은 망국에 대한 관료로서의 책임과 속죄였다. 향년 44세.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은 열사흘 전인 11월 17일이었다. 용인에서 이 소식을 들은 민영환은 서울로 돌아와 전 좌의정 조병세(1827~1905) 등과 대궐로 나아가 5적의 처단과 조약의 폐기를 청원했다.  

11월 28일 칠순 노인 조병세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자 그는 궁중으로 들어가 소두(疏頭: 상소의 대표)가 돼 연일 상소하며 참정대신인 한규설의 인준이 없는 조약은 무효라고 주장하며 5적의 처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상소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는 마침내 죽음으로써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다음날 서구식 명함 앞뒷면에 깨알처럼 적힌 유서 세 통이 그의 옷소매에서 발견됐다. 각각 동포와 황제, 그리고 외국 사절들에게 남긴 글이었는데 동포들에게 남긴 글은 울림이 남달랐다.

 

민영환에 대한 저간의 평가와 무관하게 당시 중앙 정계의 실세 중에서 국가를 망국의 길로 이끈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황제와 백성에게 사죄한 인물은 그가 거의 유일했다는 점은 두고두고 곱씹어 볼 대목이다. 

 

민영환은 스스로 소두가 돼 두 차례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제의 협박에 의해 왕명 거역 죄로 구속돼 평리원(平理院: 재판소)에 갔다가 풀려났다. 민영환은 국운이 이미 기운 것을 깨달았고 죽음으로써 이에 항거하고자 했다.

 

언론을 통해 민영환의 죽음이 알려지자 삽시간에 온 장안 사람들이 민영환의 집에 몰려들어 통곡했다. 그가 남긴 유서는 <대한매일신보>에 실려 온 국민에게 읽히면서 국민들의 애도와 슬픔의 물결로 온 나라가 슬퍼했다.

 

 

 

지사들의 자정순국이 이어지다

 

다음 날인 12월 1일에는 원임(原任: 전직) 대신 조병세(1827~1905)가 고종에게 드리는 유소(遺疏) 등을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향년 78세. 그는 유소에서 적신(賊臣) 5인의 처단과 국권 회복을 요구했다.

 

 

 

 

 

같은 날 전 참판 홍만식(1842~1905)이 여주 본가에서 아들에게 ‘처 사례(處士禮: 처사는 출사 하지 않은 선비)’로 장례 지낼 것을 당부한 다음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했다. 갑신정변(1884)의 주역이었던 홍영식의 형으로 을미사변(1895) 때에도 자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그는 이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상소 때마다 직함 대신 ‘미사 신(未死臣: 죽지 못한 신하)’이라 쓴 이였다.

 

다음날인 12월 2일 오후 5시께 황해도 황주 출신의 김봉학(1871~1905)이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그는 의병활동을 거쳐 군대에 들어와 평양 진위대에서 근무하다 부대가 서울로 올라오자 시위대(侍衛隊) 제3대대 상등병으로 서울에 주둔 중이었다.

 

민영환, 조병세의 자결 소식을 듣고 그는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던 신하로서 순국함은 당연하다. 나 또한 군인으로서 6년이나 지내면서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니 원수의 일제 무리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34세.

 

12월 3일에는 늑약 체결 후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이던 학부 주사(主事) 이상철(1876~1905)이 독약을 마시고 앞선 이들을 뒤따랐다. 이때 그는 고작 스물아홉 살이었다.

 

12월 30일에는 전 대사헌 송병선(1836~1905)이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기고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했다. 그는 늑약 체결 이후 상경해 고종을 알현하고 5적의 처단과 늑약의 파기를 건의했으며 늑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강제로 향리에 호송된 바 있었다.

 

늑약이 체결되기 전에 목숨을 버린 이도 있었다. 경기도 용인 사람 이한응(1874~1905)은 주영(駐英) 한국공사관의 서리공사였다. 1905년 4월, 일본은 한국 외교를 대리해 준다는 구실로 주(駐) 청국 한국공사관을 철수했고 5월 초에는 주영 한국공사관, 7월에는 주미 한국공사관을 철수했다.

 

이한응은 주영 한국공사관을 철수시킨다는 통보를 받자 이를 항의하고 런던의 각국 공사들에게 한일관계와 한국이 아직 독립국가임을 설득하고자 했으나 주영 한국공사관의 활동은 이미 외교권이 없다며 무시당했다. 이한응은 5월 12일 런던에서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했다. 향년 31세.

 

민영환이 자결 순국하자 그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했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인력거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직썰] 유튜버 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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