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박원순, 유구무언*
현직 서울시장님이자 대권주자로 인식되던 잠룡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인물로 정치 필모그래피를 차곡차곡 쌓아가던 그 에너지와 노력과 수 십 년의 인생 여정이 이렇게 무의미하게 불명예스럽게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십니다. 서울특별시에서 기관장(裝) 형식으로 5일장을 준비한다고요? 그런데 조용히 가족장으로 치르지 뭔 소리냐며 반대하는 청원이 벌써 8만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2020년 7월12일/ 추가 수정함. 내일이 장례식인데 오늘 반대청원이 50만을 넘겼다고 합니다.) 내일 과연 어떻게 장례식이 진행될지 자못 궁금해지네요.
고소장이 접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참담한 심정이 땅을 치고 후회해도 이미 늦었음을 통감했을 때 앞으로의 가시밭길을 걸을 용기가 없으셨나봅니다. 시장님!!! 왜 그러셨습니까? 한 말씀 해주십시요!!! ~~ 라며 집요하게 따라붙을 기자들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을 겁니다. 서울시청 내부에서 지난번 안희정씨 사건 때나 온 나라가 시끄럽게 미투 운동 때문에 그 난리를 칠 때에도 서울시청 직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우리 시장님은 절~~~ 대로 그럴 분이 아니야'라고 온몸으로 신임을 받았던 것을 토해내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고인이 된 망자에게 너그러운 민족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生을 달리하면 다 용서되고 종결되고 포장 미화되고 공로를 부각시키죠. 우리나라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리고 금방 잊힐 테니 너무 염려 마시고 남은 사람들이 알아서 다 해결할 터이니 그냥 한 톨의 미련도 없이 훌훌 뒤돌아보지 마시고 안녕히 가십시오.
2020년 7월 10일 새벽 박원순 서울시장이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아직 확실한 이유를 공식적으로는 발표하지 않았지만 발견된 유서와 함께 전직 비서가 오랜 기간 성추행을 당했다며 박 시장을 경찰에 고소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해외에서까지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서울시청은 특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사태 수습에 정신이 없을텐데요. 특히 박원순 시장이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여러 성폭력 사건을 맡아 피해자를 변호해왔고,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며 줄곧 '성 인지 감수성'을 강조해 왔기에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입니다.
시장 취임 후 서울시 성평등위원회·젠더 특보 신설 등 여성정책 강조/연합뉴스
박 시장은 변호사 시절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을 맡아 수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승소를 끌어내 인권변호사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성희롱이 범죄임을 인식시킨 국내 최초의 직장 내 성희롱 소송이다. 1993년 소송 제기 후 약 6년 만에 피해 여성의 승소로 일단락됐다. 박 시장은 이 사건의 공동 변호인단 중 한 명으로 소송을 주도했다. 그 공로로 1998년 한국 여성단체 연합의 제10회 '올해의 여성운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에 앞서 1980년대에는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렸던 고 조영래 변호사 등과 함께 부천경찰서 권인숙 씨 성고문 사건 변호인단에도 참여했다.
지난해 1월에는 성평등 문제 등에 관해 시장을 보좌하는 특별 직위로 '젠더 특보'를 시장실 직속으로 신설하기도 했다. 박 시장은 작년 2월 '서울시 여성 리더 신년회'에 참석해 "많은 여성이 저항 주체로서 독립운동(3·1 운동)에 참여했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게 됐다"며 그 정신은 1987년 민주화 운동, 2016∼2017년 촛불집회,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미투 운동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2018년 6월 3선에 성공한 뒤 연합뉴스 인터뷰에서는 '여성 정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기대가 강해진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저도 감히 페미니스트라 자처한다. 성 평등을 위해 늘 고민하고 나름대로 노력해왔다"라고 답했다. 이 때문에 성추행으로 고소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 여성 인권을 강조해온 자신의 일생이 부정될 수 있다는 중압감이 박 시장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고 간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성희롱 근절 캠페인 출범식 참여한 박원순 서울시장/ 2018년 12월 3일 서울 중구 시민청에서 기념촬영 [연합뉴스]
성평등 아카이브 기증자료 살피는 박원순 서울시장 [연합신문 자료실]
서울 동작구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성평등도서관에서 열린 '서울시 여성리더와 함께 하는 신년회' 에서 론칭한 성평등 아카이브 자료 중 자신이 기증한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자료를 참석자들과 살펴보고 있다.(2019.2.14)
서울시장 취임 후에는 서울시의 성평등 정책, 여성 정책에 힘을 실어줬다. 모든 정책을 성평등 관점에서 추진한다는 목표로 전국 지자체 가운데 최초로 성평등위원회를 설치했다. 2012년 '여성의 날'을 맞아서는 '여성의 삶을 바꾸는 서울 비전'을 발표하고 "서울 여성들이 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인권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라고 말했다. 시의 모든 예산에 성인지적 관점 반영, 성평등 관련 조례 제정, 여성건강지원센터 설치, 범죄예방 환경설계 도입, 싱글 여성을 위한 안심주택 보급 정책 등도 내놨다.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페미니즘이란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경제·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나 사상을 뜻한다.
한국의 페미니즘 및 페미니스트 역사
한국에서 페미니즘 운동은 개화기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여성단체를 조직한 것에서 시작한다. 개화기 여성운동은 여성의 교육권 보장과 남녀의 교육 기회균등을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진행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며 1920년대 한국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사회주의, 기독교 페미니즘 등 다양한 갈래로 나뉘었다.
한국의 페미니스트들
여성을 남성과 동일한 이성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로 상정하며 여성의 자유를 주장한 대표적인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에는 나혜석, 김명순, 김일엽, 박인덕 등이 있었다.
조선 최초의 본격적인 여성운동 조직은 1927년 탄생한 '근우회'로 꼽힌다. 근우회는 근우 선언문에서 “조선에 있어서는 여성의 지위가 한층 저열하다. (중략) 우리의 앞길이 여하히 험악할지라도 우리는 일천만 자매의 힘으로 우리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려 한다. 여성은 벌써 약자가 아니다. 여성은 스스로 해방하는 날 세계가 해방될 것이다.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라!”라고 외쳤다. 그러나 1928년 중반 이후 운동 노선상 갈등으로 기독교 여성들은 근우회를 탈퇴하고 독자적 노선으로 들어섰다. 한편, 이 시기 여권운동을 선도한 대표적인 페미니스트는 나혜석(1896~1948) 등이 있다.
이후 여성운동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반으로, 한국의 선구적인 여성운동 단체로 꼽히는 '한국 여성의 전화'가 1983년 설립되어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에 대한 '반성폭력 운동'을 이끌었다. 1987년에는 한국 여성민우회가 창립됐고, 이 시기 반성폭력 운동의 결과로 1994년 성폭력 특별법이 제정되고 1998년 여성특별위원회가 설치됐다.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는 2001년 1월 여성부로 격상됐고, 2010년에는 여성부를 개편해 [여성가족부(여가부)]가 발족했다.
2000년대 초반 페미니스트들은 [호주제 폐지] 성과를 이뤄냈다. 2000년 9월 137개 여성 및 시민사회단체는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를 발족해 호주제 위헌소송을 준비했으며, 2005년 호주제 폐지를 중심으로 한 민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헀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미니스트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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