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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기념공원 - 6·25 전쟁 70주년 '턴 터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

by Happy Plus-ing 2020.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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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 전쟁이 발발한지 70주년입니다. 

7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고 남북으로 나뉘어 갈등과 불신, 증오와 대결의 높은 장벽을 쌓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전쟁을 겪은 세대들이 혹은 고통을 받은 당사자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시고 이제 남은 후손들은 전쟁을 알지도 못하고 교과서로만 듣고 풍문으로만 들어서 남침인지 북침인지 조차도 개념없는 젊은이들만 남아서 나라야 어찌 되건 나만 배부르면 되는 이기가 난무하는 이 세대에 미래가 있겠습니까? 

전쟁을 통해 수많은 희생자와 고아들과 이산가족들로 상처투성이의 대한민국이 명실공히 세계 속에서 글로벌한 나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의 수고와 땀과 흘린 피로 세워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경하고 돌봐주고 보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6.25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인정해야합니다.

 

6. 25 전쟁으로 인한 대한민국 피해자, 북한 피해자, 미군-전사·실종자, *UN군- 전사·실종·부상자, 행방불명, 고아, 피난민, 이산가족 등 총 인명 피해가 840만여명에 육박한다. “제2차 세계대전 사상자가 6백만 정도였다. 6.25에 중국·러시아까지 간여하였다면, 세계대전을 방불한다”며 “그런 세계사적 거대 사건에 ‘북진설’이 들린다. 6.25는 휴전이어서 승전·항복이 없고, 전범도 없다. 하지만 남북 대면에서 6.25에 대한 언급은 어떤 형태로든 꼭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민경배 교수  / 출처: https://ckj3300.tistory.com/693 [큰 언니의 하루]

 

 

부산광역시 블로그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다. 전쟁 발발 소식을 접한 미국은 25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라 선언하고, 북한은 즉시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그 군대를 38선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또한 유엔회원국들로 하여금 유엔에 원조를 제공할 것과 북한에 대하여는 어떤 원조도 중단하도록 하였고, 6월 27일에 이르러 미국대통령 트루먼(Truman, H.S.)은 미국의 해군, 공군으로 하여금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날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회원국들에 대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한반도에서의 안전을 회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의사조치를 추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곧이어 6월 28일에는 동경(東京)에 있던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MacArthur,D.S.)원수가 내한하여 전선을 시찰하고 미국방성에 지상군의 파견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조치는 다시 7월 7일에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반도에서의 유엔의 군사활동을 위하여 미국에게 최고지휘권을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맥아더가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의 군사지휘권은 미국의 맥아더원수에게 주어졌으며, 한국을 원조하기 위하여 육군, 해군, 공군 및 지상군을 파견한 16개국의 군대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때 한국의 이승만(李承晩)대통령도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에게 이양한다는 각서를 썼고, 이것이 이른바 대전각서로써 7월 14일에 수교되었다.

 

 

UN기념공원 - 6·25 70년 턴 터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 

 

유엔기념공원

 

유엔기념공원은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로서, 세계평화와 자유의 대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유엔군 전몰 장병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이곳 묘지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51 년 1월, 전사자 매장을 위하여 유엔군 사령부가 조성하였으며, 같은 해  4월 묘지가 완공됨에 따라 개성, 인천, 대전, 대구, 밀양, 마산 등지에 가매장되어 있던 유엔군 전몰장병들의 유해가 안장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5 년 11 월 대한민국 국회는 유엔군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이곳 토지를 유엔에 영구히 기증하고, 아울러 묘지를 성지로 지정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1955 년 12 월 15 일, 한국정부로부터 국회의 결의사항을 전달받은 유엔은 이 묘지를 유엔이 영구적으로 관리하기로 유엔총회에서 결의문 제 977(X) 호를 채택하였습니다.

 

유엔기념공원 찾아가는 길

 

 

 

 

 

 

참전용사 빈센트 코트니

"한동안 한국은 나에게 '죽음'이란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공포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70년이 지난 지금, 그때 우리들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느낍니다."

캐나다 출신 6·25 참전용사 빈센트 R. 코트니(Vincent R. Courtenay·86)씨는 19일 본지 전화 인터뷰에서 "7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끔찍했던 경험(unnerving experience)이 또렷하다"며 감회를 밝혔다. 6·25전쟁 당시 한국으로 파견된 캐나다군은 2만6000명. 전사자가 516명으로, 참전 국가 중 다섯째로 많았다. 코트니씨는 1951년 16세의 나이에 참전해 1년간 복무했다. 학교를 자퇴한 뒤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다 한국에 온 것이다. 그는 "부친이 1차 세계 대전에서 영광스러운 상처를 입은 군인이었다"며 "그 아들인 나에게 자원입대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고 했다.

 

 

 

 

캐나다 출신 6·25 참전용사 빈센트 코트니씨가 지난 2019년 11월 온타리오주 윈저 자택에서 훈장을 달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가을, 코트니씨가 한 석상(石像)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본지 인터뷰에서 “한국이 폐허에서 꽃피운 모든 것에 존경을 표한다”며 “참전 용사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한국인들이 계속해서 증명해달라”고 했다. /빈센트 코트니 제공

 

캐나다 앨버타에서 군사 교육을 마친 뒤 미군 수송함에 몸을 싣고 부산항으로 들어간 그는 "공포와 두려움의 냄새를 맡았다"고 했다. 퍼트리샤 공주 캐나다 경보병연대(PPCLI)에 배속된 그는 1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제2차 후크고지 전투(1952년 11월 18~19일)' 등에서 싸웠다.

코트니씨는 비좁은 기차를 타고 올라간 전장(戰場)의 최전선은 "참혹 그 자체였다"고 했다. "배에 총을 맞고 쓰러진 동료의 피부가 녹색빛으로 변해가던 걸 잊을 수 없습니다. 한번은 3일을 꼬박 밤새우며 카펫처럼 납작해진 시체 위를 다녀야 했어요."

그는 "폭탄이 터지면 그때마다 지구가 흔들리는 기분이었고, 우리는 숨을 죽인 채 뱀처럼 기어다녔다"며 "운이 좋아서 아무도 죽지 않으면 그제야 안도했고, 적의 다음 공격을 기다리면서는 그저 살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고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기자와 홍보 컨설턴트 등으로 일한 코트니씨는 "죽음, 공포와 두려움 같은 단어가 떠오르는 땅인 한국을 40여 년간 쳐다보려 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갖은 전쟁 후유증과도 싸웠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한국의 상전벽해를 알게 됐다. 이어 90년대 들어서는 사업차 서울을 찾을 기회가 있었다.

코트니씨는 "김포공항으로 입국했을 때 감동을 잊지 못한다. 땅바닥에 꿇어앉아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고 했다. 그는 "세계 각 분야에서 선두를 질주하는 한국과 한국인에게 경의를 표한다"며 "내가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레 여기는 기여(contribution) 중 하나"라고 했다.

 

코트니씨는 이후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캐나다 출신 참전용사를 재조명하는 일에 앞장섰다. 방한 횟수만 40여 회에 이른다. 지난 1997년 부산의 UN기념공원을 찾은 것이 계기가 됐다. 그곳엔 유엔군 2300명, 캐나다 전사자 378명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빛바랜 청동 장식판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6·25를 기억하지 않고, 전우들을 제대로 추모할 계기조차 없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후 캐나다한국참전기념사업회 디렉터로 참전용사를 기리는 사업을 벌였다. 부산과 캐나다 수도 오타와에 캐나다 전몰용사 기념비를 세웠다.

 

국가보훈처와 부산시가 지난 2007년부터 개최하는 '턴 터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도 그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매년 11월 11일 오전 11시에 6·25 참전 유엔군 전몰장병을 기리자는 뜻에서 UN기념공원을 향해 묵념하는 추모 행사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11월엔 부산명예시민증을 받았다.

코트니씨는 현재 한국인 아내와 재혼해 온타리오주의 윈저라는 작은 도시에 살고 있다. 그는 "올해 안에 전우들을 만나러 한국에 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며 "한국이 폐허에서 꽃피운 모든 것에 존경을 표한다"고 했다. 이어 "우리의 희생이 숭고했고,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한국인들이 계속해서 증명해 달라"고 했다. 

 

김은중 기자 입력 2020.06.20. 01:43 https://news.v.daum.net/v/20200620014301075

 

"처참했던 6·25, 캐나다 돌아가 한국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동안 한국은 나에게 '죽음'이란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공포의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70년이 지난 지금, 그때 우리들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고 느낍니다." 캐나다 출신 6·25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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