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후 20년 인생설계표
어항 물갈이를 하면서 자갈과 모래를 모두 퍼내어 흐르는 물에 씻어 건지다가 오랜 기억하나 줏었다.
납작하고 볼품없는 자갈 하나 그 위에 지워지지 않는 펜으로 쓴 글씨.
- 청평에서 줍다 - [S & K]
벌써 20년도 넘은 기억이다. 그와 나의 이니셜을 새겨넣고 달랑 한 줄 -청평에서 줍다-
돌이 이쁘지 않은 걸 보니 그 날을 간직하기 위해서였나보다. 거슬러 올라가 앉아본다. 그땐 행복했었을까?
나는 그리고 너는...
-신혼 일기-
사랑을 맹세하고 호기롭게 출발한 가난한 우리에게 지하 단칸 셋방이 무슨 문제겠냐던 꿈같은 신혼... 밥만 먹을 수 있으면 되는 줄 알고 재래시장을 돌면서 숟가락 젓가락 양은 냄비 하나 사면서도 킬킬거리던 시절! 하루종일 냉동고처럼 얼었던 방에 귀가하여 두 사람의 체온으로 얼었던 벽이 녹아내려 새 이불을 적셨어도, 까짓것 대수냐 하던 소꿉놀이같던 새댁의 재기발랄함이 무겁게 내려앉은 겨울새벽 한기와 연탄까스에 질식되어 생명이 오락가락하던 첫 위기가 왔을 적에도 의식이 가물가물하면서 끝까지 놓지 않았던 것은 미래를 꿈꾸게하는 희망이란 놈이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젊은 날의 묵은 수첩속에서 발견한 빛바랜 모나미펜 글귀 하나 '향후 20년 인생계획표!!!' 이제 그 꼭지점에 내가 서 있는데 나를 버티게 했던 게 무엇이었던가~~~ 눈물이 되어 뺨을 적신다. 열심히 살았는데 20년쯤 지나면 살아온 날들에 대해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젊음만 사라지는게 아니고 희망조차 사라지는게 세월이 아닌가 두렵다. 이 황망한 중간결산서를 어디에 제출할건지... 어쩌면 삶에 대해 철저한 프로근성이 없었던 건 아닐까..
수첩이든 메모장이든 끄적거리는 습관은 어렸을적 부터였다. 언제나 머리속에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글자들 때문에 기억하느라 침묵하는 버릇도 생겼다. 지금도 늘 속으로 혼잣말을 잘 한다. 그러나 남편을 만났을 때 육체적인 관계보다 마음을 나누는 관계이고 싶었다. 그러나 동적인 그와 정적인 내가 공통분모를 갖기가 얼마나 서툴렀는지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없어서 쪽지글을 남기기 시작했었다 신혼 때...
아직도 이른 출근시간 밥상을 차려놓고 학교가기엔 이른 그를 깨우지 않고 알람을 맞춰놓고 수저 옆에 쪽지편지 한장 두고 출근하는 날들...나는 죽도록 사랑은 하지 않았지만 죽도록 사랑하며 살고 싶어서 어떻게든 나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는데..그는 나와 정서가 너무나 다른 사람이어서 말로 하면 될 걸 왜 쪽지로 사람 간장을 후비느냐고... 다툴 때 그 말이 나오면서 그 날 이후로 쪽지글은 중단되었다.
그 다음은 일기장이었는데, 혼자 감춰둔 일기속에서는 얼음같은 냉소와 혀를 깨무는 비통함과 가난함의 극치를 달리는 현실과 싸우느라 피를 토하며 썼었다.
(지금 창밖엔 아직도 비가......)
그렇게 쌓은 글들이 대학노트 3권정도 되었을 때 이삿짐을 싸다가 그에게 발각?이 되었는데 그 원망의 대상이 자기였노라고, 어떻게 가슴이 이렇게 한이 많을 수 있냐고 내가 뭐랬냐고 자라온 환경이 어두워 너랑 함께 밝게 살고 싶다고 말하지 않더냐고 왜 내 말에 귀기울여주지 않느냐고....
그러면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싸우는 와중에 몇 년간 내 마음을 고스란히 받아 적었던 그 노트들이 호르르르~~ 불 살라졌다 내 눈앞에서...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미래를 생각하며 살으라고 뜻은 가상한데 마음에는 와 닿지를 않네.
그 노트가 그리운 날에...
2001.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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