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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한 하루/오늘보다 나은 내일

비밀번호

by Happy Plus-ing 2003.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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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연변

 

비밀번호

 

서울의 모 집사님 아파트 현관은 비밀번호로 열리는 신식자물통입니다.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그 문도 따고 들어가 도둑질하다 들킨 넘들의 비상한 재주는 생각보다 엉뚱하고 간단하였더랬습니다.  현관문과 바닥사이의 아주 작은 틈새로 이물질을 들여놓으면 자물쇠의 센서가 사람이 들어온 줄로 착각하기 때문에  손잡이를 돌리면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건줄 알고 태연스레 문을 열어준다는데요.

그걸 또 뉴스에 방송을 하면서 상세히 보여주던데 그로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본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러고보니 나 역시 한 몫 거들고 있는거네요... ^^ 가진게 별로 없어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되니 그것도 행복입니다.

 

재작년에 시골에서 혼자 사시던 시어른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젊어 홀로 되셔서 생계유지 차원으로 개 몇마리 키우며 사셨는데 그해 추석을 앞두고 벌초하러 가셨다가 숲속에서 벌에 쏘여 돌아가셨거든요.  주인은 소식도 없고 먹이던 개들은 배가 고파 몇 날 며칠을 짖어대니 동네 주민이 파출소에 신고를 하고 파출소에서 신원조회를 하였는데  어째 둘째조카인 우리집으로 연락이 닿았어요. 그래서 을 신랑이 시골 문중산을 다 뒤져 기어이 시신을 찾아내고서 조촐하게 장례식을 치러드렸습니다.  말이 추석이지 아직 막바지 더위가 가시지 않은 때라 처참한 시신을 직접 본 울 신랑 몇 날 며칠 밥 못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홀로 외롭고 가난하게 사신 분의 농짝에서 통장이 몇 개씩이나 나오고 구석구석 간직해 둔 것들을 찾아내면서 안먹고 안입고 모아서 이게 다 뭔가 싶은게 참으로 허무했습니다.

 

통장에서 돈을 찾을려면 비밀번호를 알아야 되잖아요. 아무나 돈을 찾을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되어서도 안되는거니까. 돌아가신 분에게 비밀번호를 물을 수도 없고..속수무책..장례치르며 병원에 당장 치러야 할 돈 100여만원을 급조하느라나는 나대로 또 얼마나 분주했었는지. 기천만원짜리 통장을 여럿 손에 들고서도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라 애간장을 끓였더랬습니다.

그런데 직계가족 딸이 나타났습니다. 홀로 된 아비를 두고서 결혼도 안한 채 멀리멀리갔다가  제 아비 부음을 어떻게 듣고 달려와서 고스란히 몇 천만원 통장을 거머쥐고  멀리멀리 또 가버렸습니다.

단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게 증명이 되니까 비밀번호는 몰라도 되구요. 또다른 직계가족이 나타날까봐 그러는건지 1년이라는 시한을 둔 뒤에 인출할 수 있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내 돈은 홀라당... 바람과 함께 사라지구요.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사라진 나뿐 년.. 어디서 뭘하며 잘 처먹고 사는지 에라이 나뿐 년..신용카드나 현금카드를 패스포드에 몇 개씩이나 꽂아서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공연히 불안하더만,지갑을 소매치기 당하든지, 언젠가 나 처럼 택시안에라도 흘려놓고 내리든지..어쨋든 잃어버리면.. 그런 난감할 일이 또 있겠나 싶었는데.

은행도 이젠 못 믿을래나.. 머리좋은 누군가에 의해 나의 비밀번호가 노출되고 직접적으로 재산상의 피해까지 보게되는 일이 자꾸 보도되니 며칠동안 심사가 뒤틀립니다. 머리나쁘면 제 몫도 못챙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즐겨쓰는 S **-club이라는 싸이트는 해킹을 밥 먹듯이 당하고 아바타에게 사준 옷이며 소품들이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리는 일이 다반사여서 실제로 진짜돈을 강탈당한 것 보다 더 허탈해하고 짜증을 내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젠 지문으로 인식하고 음성으로 통과되는 시대라야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식구들끼리 서로의 주민등록번호를 모르며 사는 집은 별로 없을겁니다. 왠만하면 외우고, 못 외우면 늘상 가까이 있는 의료보험증에 다 적혀 있거든요. 자기 혼자만의 비밀의 성처럼 간직했던 메일박스도 하루아침에 식구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가입된 싸이트에서 주민등록번호만 알면 아이디는 물론 비밀번호까지도 알 수 있음을 최근에 알게 되었습니다. (울 신랑은 원체 외우는 걸 싫어하므로 온 식구들의 비밀번호를 동일하게 사용하자는 제안을 어제 하더군요. 어이구 끔찍혀라~~) 이럴수가... 이것 하나조차 완벽한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군요.

우리.. 딸래미 방에서 쓰레기가 거짓말 좀 보태서 한 트럭분이 나옵니다. 이제 맘 잡고 공부할거라나요. 그놈의 마음은 맨날 잡으러만 댕기고... 잡히는 꼴은 못 보겠고 ^^ 초딩 1학년때부터 모았던 시험지랑 이뿐 장난감, 직접 그린 종이인형, 기타 등등.. 그런데 그 청소를 이틀에 걸쳐서 하는 것입니다.

속으로 끙끙.. 한 마디 해줄까 하다가 어쩌면 방을 치운다기 보다 사춘기의 정점에서 한 고비 단락짓고 넘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만두었습니다. 아니 정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 하고 불쑥 나타나더니 한보따리의 이면지를 들고와서 성냥을 찾는군요 태울거라면서요. --

그게 뭔데? 하고 물었더니 중학교때 쓴 시나리오 몇 편이래요. 한동안 극작가가 되겠다고 학교만 파하면 컴퓨터앞에 붙어앉아 하룻밤에도 수 십장씩 프린터해 내던 때가 기억났습니다. 재주도 많지요? 전에 말했잖아요 제가... 왜 태울려고 그러냐니까.. 대답이 가관이에요. 자기가 갑자기 죽고나면 누군가 자기의 방을 다 정리할텐데 그때 이 습작을 보면 얼마나 챙피할까 싶어서.. 왠만한 건 다 태울거라네요. 까무라칠 일이라구요?

이런 생각은 어른들만, 황혼기의 우리들만 하는 줄 알았더니 어린애들도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구나.. 싶어 좀 놀라기는 했어요. 마당 한귀퉁이에 앉아 그걸 태우는 아이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네요.

내가 있던 그 자리에 나는 없고 내가 있었던 그 자리에 누군가 나를 대신 정리해줄 때... 소름끼치죠. 그래서 항상 주변을 정리하면서 살아야겠다라고.. 수십번도 더 다짐하며 살았었던 내가 딸의 얘기에 새삼스러워할 필요는 없었어요.

화형식을 마치고 우리 모녀 목욕탕엘 갔습니다. 뜨끈뜨끈한 탕속에서 얼굴이 벌개지도록 몸을 데우고 내 다리보다 더 굵어진 다리도 밀어주고 내 등도 밀어달래면서 이런 저런 많은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엄마에게 다 말하지 못했던 어린날의 작은 상처까지 이젠 담담하게 말 해줄 수 있는 세월이 흘렀나봅니다.

본인은 아팠다는데 정작 나는 왜 목젖이 뜨끔울울하도록 행복하단 생각이 스물스물 올라오는지요

세상에 비밀은 없을지라도 딸에게서 들은 비밀같지도 않은 비밀은 죽을때까지 안고 갈 겁니다.

아니 아예 비밀코드를 잊어줄랍니다.

2003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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