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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한 하루/오늘보다 나은 내일

담임선생님께 쓰는 편지

by Happy Plus-ing 2005.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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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선생님께 쓰는 편지

 

 

 

박 * *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시지요?
추석은 잘 보내셨구요? 록이 엄마입니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듯 하여 아침에 춘추복을 꺼내 다려놨더니 낮에는 덥다며 기어이 그냥 등교하는 아이를 보내놓고서 선생님께 편지를 씁니다.

지난 여름 방학때 두 어번 전화까지 해 주시면서 아이를 챙겨주시던 사랑에 개학과 동시에 선생님께 인사 여쭈어야 되겠다 싶었는데 그것도 자꾸 차일피일 미뤄지고 말았네요.
아이가 워낙 운동을 좋아하다 보니 공부에는 영 재미를 못붙이고 또 어렸을 적부터 공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지 못했던 자책감과 책상에 앉아 있는 습관을 가르치지 못한 저의 책임이 너무 컸던 바... 학습능력이 좀 뒤떨어져도 아이에게 크게 나무라지도 못하고 그저 때가 되어 스스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절실함이 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그동안 아이들에게 전혀 신경을 쓸 형편이 못되었더랬습니다. 지금도 형편이 그리 나아진 것은 없지만요. 선생님이 크리스챤이시면 대충만 말씀드려도 아실 수 있는데, 상세히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습니다.   다행이 학년이 올라가면서 여자아이들과 섞여서 공부하게 되었다고 하길래... 여자아이들은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하는 남학생들을 좋아한단다... 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넌지시 던져도 보았습니다.(^^ 좀 졸렬한가요)

다름이 아니구요.
지난 여름방학 때 전국 중고등부 대항 축구시합이 있었잖아요. 록이가 조직한 멤버들이랑 방학이라 저희집에 놀러온 록이 사촌들 것까지 도시락 싸고 음료수 한 트렁크 싣고 간식 챙겨서 얼굴이 새까맣게 타도록 운동장에서 함께 놀다 왔어요. 8월 초였으니 덥기는 얼마나 덥던지요. 두 게임인가 이기고 나머지는 패자부활전으로 승부차기를 해서 몇 게임 이겼는데 막판에 얼음물이 모자라길래 시내로 나와서 얼음과 얼음물을 사가지고 들어가는 길에 전화가 오더군요. 제가 없어서 졌대나 어쨌대나... 놈들... 덕분에 올 여름 내내 논매다 왔냐 밭매다 왔냐 소리 듣고 살았구만.

축구대회가 끝나고 나서 마음잡고 여름방학때 보충공부를 좀 했으면 싶은 마음은 나홀로 바램이고 녀석이 좀체 마음잡고 책상에 앉질 않는거에요. 그래서 마침 우리나라 여자축구단 코치겸 복지단체 소속 코치를 만날 기회가 있어서 개인적으로 테스트 받게 했더랬어요.

가면서 즈이 아버지랑 약속하기를... 만약에 테스트 받은 후에 재능이 없다라고 판정이 나면 그땐 미련없이 공부하겠노라고... 그랬는데 정말로 그 코치가 아이에게 알아듣기 쉽도록 '...야! 국가대표가 되려면... 23명 엔트리안에 들어야 하는데 그게 얼마나 힘이 드는 줄 아나. 나도 태극마크 못달아봤단다. 그러니 차라리 우리나라에 의사가 6만명인가 된다는데 그 안에 들려고 노력하는게 훨씬 빠르지 않겠나...' 한 거에요. 그리고 나서 지난 여름방학 남은 기간동안... 열심히 공부했냐구요?

아니요. 아이가 얼마나 마음을 잡지 못하고 멍청하니 생각은 딴데 가 있고 몸만 집에 앉아 있으니 뭘 시키면 짜증부터, 화부터 내구요. 내 속이 지금 말이 아니다 그러면서요. 저러다가 아이 버리지...싶더라니까요.  결론은요.  아이가 그 고비를 잘 넘겼어요. 선생님도 관심있으셨으니까 칭찬해주세요.

며칠 전 추석 연휴 때 컴퓨터 게임을 한참이나 하길래 좀 그만하라고 했더니 추석 지나고 나서 공부 열심히 할거라고 하대요. 뭐 다른 때처럼 그냥 하는 소리겠거니.. 했지요. 설마 시험기간도 멀었는데...
그런데 그저께부터요..정말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어요.
저녁먹고 나면 맨날 텔레비전만 보던 아이가요. 3시간 동안이나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거에요. 투명유리가 아니라 보이진 않지만...전 믿어요. 즈이 이모가 학원에서 가르치는 몇 권의 책을 갖다주길래 저도 내친 김에 시내 가서 자습서 몇 권 사왔어요.

- 너..정말 공부했냐? 에이...설마 - 하고 농담처럼 말하면 얼마나 애가 짜증나겠어요.
그래서 아빠에게(아이 모르게 폰 메시지로) 아들래미 방에 우연을 가장하여 들어가서 확인도 해 보고 격려도 해주라고 했어요.

저 잘했지요?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것이 최선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부해야 할 시기를 놓칠까봐 전전긍긍하다가 하도 기뻐서 선생님께 보고하는 거에요. 선생님도 당연히 기뻐하실 거 같아서요. 그렇다고 이번 중간고사 성적에 크게 기대하진 않아요. 단숨에 효과가 나타날리 없잖아요. 하지만 아이가 책상에 앉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 덕분이기도 하단 걸 압니다. 언젠가 엄마같은 선생님이라고 하더라구요.  점심 시간에 이것 저것 챙겨주신다구요. 아이가 무뚝뚝해서 집에 오면 별 말을 안하는데도 가끔 선생님께서 챙겨주시는 부분에 대해선 얘기하더라구요.

아이들앞에서 민망했다면서.. 속으로는 좋았던가 봅니다.
내일 보시거들랑 안아 주시든지 등이라도 한번 더 쓰다듬어 주십시오. 선생님보다 어깨 위는 더 큰 징그런 놈이지만요.

편지로, 말로만 뇌물 씁니다. (^^)
선생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수고하십시오.

2005년 9월 23일 ** 엄마 드림

 

편지를 띄운 후 지금까지도 여전히 책상에 앉아 공부하긴 하는데 축구화도 같이 책가방속에 숨어서 등하교를 하고 있는 걸로 봐서 영 포기하진 않고 눈치껏 하고 있나 봅니다. 장래희망이 [축구선수]라고 공공연히 외치던 놈이었으니 얼마나 쓰리고 아팠으리오. 이번의 좌절이 어떤 열매로 맺어질지 자못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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