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바다는 반복을 하면서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푸루스트 (M. Proust)는 "육지는 끝없이 변하지만 바다는 천지창조 때의 모습 그대로" 라고 말한다. 인간은 육지의 모든 것을 변형시키고 분할했다. 땅을 깎아 길을 만들고 마을과 도시를 세워 강에는 다리를 놓는다. 때로는 성터를 허물어 공장을 짓기도 한다. 그것이 땅의 역사이다.
하지만 바다 위에서는 아무것도 짓거나 허물 수가 없다.
배가 지나가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바다는 역사를 만들지 않고 거꾸로 그것을 지우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문화의 첫 강의에서 여러분들에게 지우개 이야기를 했다. 바다야말로 거대한 그리고 불멸의 초록색 지우개가 아니겠는가. 바다에서는 어떤 관념도 파도처럼 일다가 금시 소멸해버린다. 산맥 같은 해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곧 잔잔한 수평으로 돌아가 버린다. 어떤 형태 어떤 색채도 바다는 허락하지 않는다. 파도의 형태와 마찬가지로 바다의 색채 역시 들판처럼 그렇게 파란빛 일색으로 상채기를 낼 수는 없다. 그래서 호메로스는 바다를 포도주 빛에 비유하기도 한다.
누가 검게 출렁이는 밤바다와 황금빛으로 불타는 아침 바다를 같은 바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들뢰스의 말대로 바다는 많은 파도를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소멸시킨다. 파도가 절정의 높이에 이르면 제가끔 흰 물방울로 흩어지면서 무너진다. 마치 "이만하면 됐어"라고 독백하듯이 작은 소리를 내면서 하나 하나의 파도들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바다는 파도가 묻히는 거대한 무덤이고 침묵이다. 그래서 만약에 바다에게 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생의 소요(騷擾)를 가라앉히고 달래는 "텅 빈 것" 에의 그리움일 것이다.
그렇다. 분명히 바다는 언제 보아도 빈 항아리 속처럼 텅 비어 있다. 바다에 가거든 다시 그 지우개를 생각하라. 욕망과 지식을 수평으로 되돌리는 그 펀펀한 원초의 대지를 생각하거라. 그리고 여름이 지나면 또 다시 시작하는 나의 작은 파도들을 달래기 위해서 텅 빈 공간을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 빈자리에 높은음자리표로 바람이 불면 어리고 싱싱한 초록색 파도들이 다시 생겨날 것이다. 젊음은 그렇게 탄생한다.
글/ 이어령 『젊은이에게 주는 여름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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