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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과 오늘의 대한민국 - 태극기는 아무 때나 흔드는 것이 아닙니다.

by Happy Plus-ing 2023.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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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과 오늘의 대한민국 - 태극기는 아무 때나 흔드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3월입니다.

특이하게도 3월은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달입니다.
올해 3월 24일은(매년 3월 넷째 주 금요일) 서해 수호의 날(연평도, 천안함 희생자들을 추모)로 지킵니다. 
■천안함 희생자 ㅡ>2010년 3월26일/ 평균나이 22세
■유관순ㅡ>3.1운동 후 1920년 9월 28일. 17세 순국
■윤봉길ㅡ>1930년 3월 6일 나라를 위해 출가하신 날. 25세 순국.
■안중근ㅡ>1910년 3월 26일. 31세 순국
■도산 안창호ㅡ>1938년 3월 10일 흥사단사건으로 복역 중 60세 순국
그리고...
■2017년 3월10일은 박근혜 前대통령이 탄핵을 당한 날이기도 하네요.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1919년 3월 1일은 정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전국을 태극기와 함성으로 뒤덮은 민족자주독립을 외쳤던 날이었습니다.

 

 
 

1919년, 나이 16세의 유관순은 고등과 1년생이었다. 당시 일제의 수탈과 탄압에 반대하는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에 당황한 일제는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린다. 일제의 휴교조치로 이화학당이 문을 닫자 유관순은 거리로 뛰쳐나와 3·1 만세운동에 가담하고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공주, 청주, 진천, 연기 등 40여 부락을 돌며 학생과 주민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한다. 그리고 그 해 음력 3월 1일, 천안 아오내 장터에 모인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일일이 나누어주고 대열에 앞장서 가두시위를 주도하기에 이른다. 그때 뒤늦게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관순의 부모도 학살당한다.

 
 

어떤 분이 잘 정리해놓으신 거 퍼왔어요

 
** 항거:유관순이야기  보셨나요?  너무 잔인하고 감옥에서 고문받는 장면만 많아서 너무 불편했어요**
** 실제로 지난 설 구정연휴때 딸아이하고 서울 나들이 1박 2일 하면서 서대문형무소를 다녀왔는데요. 피칠갑을 한 감옥내부를 들여다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이런 애국자들이 계셔서 오늘 우리가 이런 자유를 누리면서 살게 된거잖아요.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감사합시다. 나라가 없는 설움,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에도 동감하지만 연약한 여학생의 몸으로 그 모진 고문을 당하고 아랫도리를 못쓰게 만들어놔서 결국은 가만히 둬도 죽을 판국에 시체를 토막까지 냈다고 하지요. 이러니 일본을 왜놈이라고 왜구라고 부르면서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 걸식 고아가 된 어린 동생들을 남겨둔 채 관순은 ‘아오내 장터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고 투옥된 후에는 법정에서 재판을 거부하며 검사에게 걸상을 내던지는 바람에 법정모독죄가 가산되어 7년형을 선고받는다. 서대문 형무소 8호실 세 평도 안 되는 감옥 복역 중에도 형무관에게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 1920년 17세의 꽃다운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토막 난 관순의 시체는 형무소 지하실에 방치되어 있다가 이화학당 교장인 윌터에게 인계되고 관순의 시신을 거둔 윌터는 정동교회에서 학생들과 함께 관순을 위한 진혼예배를 드린다.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다니게 된 유관순은 믿음과 사랑을 실천하는 성실한 학생으로 기억된다.

 
 

 
장부출가생불환ㅡ윤봉길의사

 

1931년 선생이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쓴 선언문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과 선언문 사본(오른쪽).

 
 
 
1930년 3월 6일, 윤봉길 의사는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에 이르기까지 그의 고뇌와 결단은 중국 청도(靑島)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라는 서신에 잘 드러나 있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습니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 저도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청년 세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윤 의사에게 있어 그 사랑은 곧 민족애였다.
근대적 사고와 혁명가적 열정을 함께 갖춘 사람이 바로 윤봉길 의사였다. 월진회원들이 마련해 준 여비를 갚기 위해 중국 청도의 세탁소에서 1년여간 일한 것만 보아도 그 인격의 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1931년 윤 의사는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던져 조국 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소원하던 조국 독립의 제단에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
백범 선생과 윤 의사는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를 접하게 된다. 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던 기회였던가. 오로지 자신의 몸을 던져 독립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천리 먼 길을 달려온 윤 의사였다. 윤봉길 의사와 백범 선생은 드디어 그 기회를 맞은 것이다.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날, 행사장 단상 위로 품고 간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은 사망하고 도열해 있던 원흉들은 다치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윤의사의 쾌거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이로 인해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여 총살을 당했으니 그때 나이 약관 25세 젊은 청춘이었다.
 
 
 

안중근 의사께서 엄청난 독서광이셨다지요.

 
 
1910년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신 날입니다.ㅡ
1909년 3월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다짐하면서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을 자르셨고, 같은 해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처단하고 체포된 뒤 중국의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셨으나 그 유해는 실종상태라고 합니다.
31세 짧은 일생을 그야말로 굵직하게 살다 가셨다.  비록 생은 길지 않았으나 남긴 업적은 위대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일 외에도 삼흥학교, 돈의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계몽운동 추진과 인재양성, 항일 의병조직, 독립 투쟁 등 그 짧은 생애동안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념으로만 사셨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서울특별시 중구 소월로 91(남대문로 5가)
지하철 4호선 회현역에서 하차 기념관까지 걸어서 15분 정도 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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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동맹비 /러시아 연해주

 
 
(서울=연합뉴스) 러시아 연해주의 소도시 크라스키노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단지동맹비'와 이 비 위에서 빛나고 있는 북두칠성을 담은 사진이 안 의사 서거 110주년인 26일 공개됐다.
이 사진은 1년 넘게 고려인의 자취와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사진 작업을 해온 김진석 작가가 몇 번의 시도 끝에 찍은 사진이다.
김 작가는 안 의사의 어릴 적 이름이 '안응칠(등의 일곱 개의 점을 뜻함)'인 것에 착안해 안 의사의 상징인 '단지동맹비' 위에서 빛나는 일곱개의 별을 사진에 담아냈다. 단지동맹비는 안 의사가 동지 11명과 1909년 3월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다짐하면서 왼쪽 네 번째 손가락을 자른 것을 기리는 비석으로, 안 의사는 같은 해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동지들과의 맹세를 지키게 된다. 이후 안 의사는 머나먼 타향인 중국의 뤼순 감옥에서 1910년 3월 26일 순국했지만, 아직 안 의사의 유해는 실종 상태다. 2020.3.26 [김진석 작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3월 10일은 민족의 스승이신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께서 순국하신 날이다.

평생을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민족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신 선생님께서는 흥사단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극도로 악화된 간경화증으로 병보석되어 지금의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치료 중 돌아가셨다.
1878년 11월 9일. 고종 15년 출생 / 1938년 3월 10 일. 60세 사망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농담으로도 거짓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는 가르침은 정직과 함께 성실만이 우리 국민이 신뢰받는 민족이 되게 하고 우리나라를 갱생시키고 영광 있게 하는 길임을 역설하셨다.
60 평생을 절개를 지켰고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추호도 비난받을 점이 없었던 도산은 희망을 갖고 노력한 지도자요, 외면적인 허세보다도 실질적인 충실을 강조한 진정한 스승이셨다. ㅡ정근모박사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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