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본 것들을 위하여 /이어령
한여름에 그리고 흰 영사막처럼 모든 풍경이 정지하고 있을 때,
아이들이 웃통을 벗고 모래밭 길로 뛰어 달아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창 끝 같은 예리한 햇빛이 검은 피부에 와 찍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하늘로 뻗쳐 올라가다가 그냥 사라져 버린 하얀 자갈길을 본 적이 있는가?
매미 소리에 취해 버린 나무 이파리들이 주정을 하듯 진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보았는가? 여름 바다를.
시의 첫 구절과도 같고, 터져 버린 기구와도 같고,
녹슨 철책을 기어올라가는 푸른 담장이 덩굴과도 같고,
원주민끼리의 잔치와도 같은 그 여름 바다를.
번쩍거리며 풀섶으로 숨어 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공룡의 새끼를 닮은 도마뱀의 꼬리였던가?
옛날 아주 옛날에 창공을 향해 쏘았던 잃어버린 그 화살촉이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보다도 먼 몇 천년,
조상들이 멧돼지를 사냥하다 버리고 간 돌칼이었는가?
우리가 여름에 본 것들은 절대로 환각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깨어 있었고 천 번이나 만 번이나 여름 태양이 출혈을 하는
그 뜨거운 빛의 세례를 보고 있었다.
돌까지도 아득한 옛 생명을 끌어안고 사는 화석처럼 보였고
식물 채집통에서 해방된 풀들은 모두 양치류(羊齒類)처럼 톱니가 져 있었다.
다만 잠들어 있던 것은 시간뿐이었고
우리는 대낮 속에서 분명 낮잠을 잔 것이 아니었다.
원시의 기억들이다.
흙 속에 매장된 흰 뼈들이 유리처럼 투명하게 풍화되어 부서지는 시간들이다.
여름에 본 것들을 잡아 두기 위해서, 도시의 시인들이여.
하품을 하지 말라. 그리고 낮잠을 거부하라. '
이어령《눈을 뜨면 그 때는 대낮이어라 (1977)》 中에서
'오늘도 감사한 하루 > 책속의 한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리스챤 문인들은 (0) | 2013.04.29 |
---|---|
박재동 `아버지, 달이 밝습니다. 손잡고 싶습니다` (0) | 2011.05.07 |
송 복, 詩 읽는 사회 (0) | 2005.04.06 |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3) | 2005.03.23 |
이명원, 사랑...그 빛바랜 투쟁 (1) | 2005.03.08 |
댓글